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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70평생이 한순간 ... 많은 사람들이 건강해지길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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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작성일 20-08-0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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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70평생이 그냥 한순간인 듯 싶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살기 참 힘든 세월이었지 요. 우리 세대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6.25 전후 어릴 적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살았지요. 보 릿고개가 있어 매년 배고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언니 셋, 아 래로 남동생 둘이 있었지요. 지금 큰 언니는 교통사고로, 바로 밑 남동생은 약 50년 전 군대 생활 중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막내라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10대 후반까지도 아버지가 업어주시곤 했으니까요. 반면, 어머니의 반대로 중학교 진학을 못했습니다. 공부를 잘했지만,“ 딸년 공부시켜 뭐하냐”는 어머니 성화에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배우지는 못했지만, 전주라는 도 시에 나와 잠업시험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세련된 도시녀가 됐지요. 


언니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니에게 듣던 대로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전주에서 직장을 다니던 남편은 시부모와 시조부의 부채를 갚느라 뼈골이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부종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이혼은 엄 두도 못 냈지요. 아이가 생겼고, 이 아이를 시골에서 똑같이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남편과 함께 서울 로 왔습니다. 


남편은 처음에는 배추장사를 했지요. 이 후 배관 일을 했습니다. 


둘째가 생기고 나서 남편 몸이 안 좋았습니다.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떼어 친정을 돌며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고, 병원비를 댔습니다. 그 게 몇 해였습니다. 남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일을 했습니다. 


70년대 후반, 남편이 돈을 벌러 사우 디에 갔지요. 나는 서울에서 계란장사 요구르트 장사 를 했어요. 그래서 하꼬방(판잣집)이라고 조그마한 집 한 칸을 장만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방도 하나 주고…. 돈을 모아 천호동에 철물점을 냈습니다. 


몇 해 잘되 는가 싶더니, 이내 사기를 맞아 있는 집마저 내놓고, 길 바닥에 내앉게 됐습니다. 가족이 뿔뿔이 헤어졌지요. 그 이후에도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놈의 돈, 돈 때문이었습니다. 큰 아이가 결혼을 하고, 손주를 보고 잠시 가족이 함께 살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손주 녀석들을 보던 것이 또 다른 행 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나는 나만 고생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남 편이 원망스러웠고, 시부모님이 원망스러웠지요. 왜 내 인생만 이런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바뀌었습니다. 모두 

내 탓이란 걸 알게 된 것이죠. 그동안 살면서 죄를 지 었는지, 지금도 회개하며 지냅니다. 


남편도 불쌍한 사람이더군요. 늦었지만, 아주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오행생식을 만난 건 자식 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전에 한두 번 먹기는 했지만, 지난봄처럼 꾸준히 먹은 기억은 없습니다. 평소 손마디 관절이 안 좋았는데, 이게 무릎까지 퍼지더라구요. 


병원을 계속 다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아파 지난 4월 어느 날 막내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들이 득달같 이 달려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 니다. 손마디 견관절, 어깨, 무릎 턱관절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정밀 검사결과‘ 류머티즘’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밥이 잘나오는 병원이었는데도, 도대체 음식을 삼킬 수 없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오행생식(상화)뿐 이었습니다. 생식을 두유에다 타 먹었습니다. 이것도 안 먹으면 그 많은 약을 먹지 못하니 먹어야 만 했습니다. 


의사는 식사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생식만 목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상화 생식을 하루 세끼 먹으며 한 달 반을 버텼습니다. 


운동이라고 는 누워서 다리 들기, 하루 1~2번의 휠체어 산책뿐이 었습니다. 


고혈압과 당뇨가 있었는데, 음식을 끊고 생식만을 먹으니 정상으로 돌아오더군요. 의사가 그럽디다. 도 대체 뭘 드시기에 체력도 안 떨어지고 당뇨와 혈압도 정상으로 되느냐고요. 


생식 먹어서 그렇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내게 보내 주신 생식을 먹고 나았다고요. 입원동안 애들이 소변을 받아내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큰일 치를 준비도 했었다더군요. 지금은 걸어서 산책도 나갑니다. 


뭐 하는 일이 산책과 성경책 읽기, 교회 다니기입니다만,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 나 마찬가지지요. 솔직히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습니다.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아들과 며느리가 잘하는 것도, 아플 때 오행생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 로 살아가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행생식을 접해 건강해지길 기도합니다. 




* 본 인터뷰는 회원들과의 경험공유를 위해 진행하였습니다. 회원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것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텨뷰 내용중 질병과 관련된 내용은 의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없으며, 의학적 내용은 의료진의 상담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울러 이 글은 인터뷰자의 건강상태로 구술을 통해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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